나와 주변을 살피는 섬세한 시선, ’경계에 머무는 시선’展
마음도, 머리도 복잡할 때면 전시장을 찾습니다. 어렸을 땐 극장에 숨어들곤 했는데, 어느덧 영상 작품이 영화의 자리를 대신했지요. 게다가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엔 전시장이 더더욱 좋은 선택지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경계에 머무는 시선>이 추천할 만한 전시인데요. 이번 프로그램의 부제는 ‘막간’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필름앤비디오 정규 프로그램 사이에 소개되어 관객에게 호평받은 작품을 다시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죠. 저 역시 ‘막간’을 활용해서 다녀왔습니다. 과연 어떤 경계에 그들의 시선이 머물렀는지, 그리고 그들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어떻게 만나고 포개질지 천천히 살펴보면서, 더위뿐만 아니라 어지러운 마음도 함께 식힐 수 있었습니다.
<경계에 머무는 시선>에서는 여성 감독 세 명의 영상 작품을 소개합니다. 모두 사회 주변부의 인물과 공간, 그들의 감각과 감정, 그리고 정서를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는데요. 7월에는 그중 켈리 라이카트의 작품 두 편을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영화 감독인 라이카트는 침묵과 여백이 가득한 미니멀한 연출과 독창적인 장면으로 인물의 고요한 삶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쇼잉 업>은 예술가의 일상을 다뤄 더욱 흥미로웠는데요. 그간 우리가 보아온 예술가와는 달리, 주인공을 괴롭히는 건 치열한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일상 도처에 깔린, 실로 사소한 일들입니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말이죠. 감독은 창작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향해 매진하는 예술가가 이 세상의 일원으로 복잡한 세상을 살아내면서 어떻게 정체성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드러낼 수(Show Up)’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같은 날 연달아 본 <퍼스트 카우>는 그야말로 ‘반(反)서부극’이라 할 만합니다. 작품은 19세기 초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섬세한 요리사 ‘쿠키’와 중국계 이민자 ‘킹 루’의 우정을 그립니다. 총을 들지 않은 이들의 삶은 결코 영웅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삶은 우정을 넘어 일종의 연대로 다가옵니다. 다른 날에 상영되어 아쉽게도 보지 못한 <믹의 지름길> 역시 1845년을 배경으로 그 시대의 개척민이 생존과 인간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라 합니다. 모르긴 해도 라이카트 감독 특유의 느릿한 시선과 절제된 호흡이 광활한 사막 풍경 속에서 한 편의 그림을 그려냈을 겁니다.
오는 8월에도 막간의 시간을 내 다른 작품을 챙겨 볼 예정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소외된 지역을 배경으로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가치와 감각을 환기하는 작품을 보여줍니다. 한편 아르헨티나 출신 영화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복잡한 남미의 역사 속에서 개인과 권력, 계급, 젠더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입니다. 두 작가 모두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탈피, 시공간을 감각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온 터라 더욱 기대됩니다. 그곳에는 기원전 에트루리아 시대의 무덤을 불법 도굴하는 아르투의 이야기도 있고(<키메라>), 한여름의 어마어마한 습도와 그보다 더한 침묵 속에서 침몰해가는 부르주아 대가족도 있습니다(<늪>). 이들의 상상력은 어떤 세상에서든 우리가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을, 낯선 이야기를 통해 펼쳐놓습니다.
결국 이 작업들이 지구 반대편 서울에 있는 저라는 관람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건 이들의 영화적, 예술적 실험이 새로운 시도에 그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경계에 머무는 시선’은 역설적으로 경계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115년 만의 폭염은 여름 내내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어떤 예술가의 말대로 더위가 사람을 몰인정하게 만드는 순간을 자주 경험할 겁니다. 그때마다 내 일상에, 내 삶에 불어오던 특별한 시선에 잠시 몸과 마음을 내맡겨보는 건 어떨까요. 전시는 9월 13일까지이지만, 매일 상영되진 않습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아니니, 꼭 상영 시간표를 확인하고 방문하시기를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