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선택이 만든 밴드, 심아일랜드
울타리도, 관객도 없었다. 데뷔 1주년을 맞이한 심아일랜드가 광활한 초지에서 기쁨과 환희, 동심을 마음껏 표출했다.
마구잡이로 핀 들꽃과 윙윙거리는 잠자리 무리를 헤치고, 멀리서 심아일랜드(Simile Land)의 다섯 멤버가 걸어오고 있었다. 물고기가 많다는 뜻을 지닌 화성의 어섬, 원래 있던 비행장이 사라진 후 갑작스러운 고요가 찾아온 이곳이 오늘 이들의 독무대였다. 생애 첫 화보 촬영을 위해 근사하게 차려입은 다섯 남자가 평소와 다른 일과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음악을 재생했다. 몇몇 멤버가 섀도우 연주를 시작했고, 스태프들도 고개를 까딱였다. 이날로 심아일랜드 유니버스에 입문한 스태프 중 한 명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댄스 파티를 열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별난 아이디어는 아니다. 심아일랜드의 공연에서도 종종 댄스 파티가 열린다.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과의 궁합을 가늠하고자 한다면 ‘Universe Party’ 공연 영상을 재생해보길 권한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얼마간 지나간 뒤 관객 쪽으로 민첩하게 몸을 돌린 멤버들은 검지를 치켜든 보컬 심아일의 리드에 맞춰 손발, 어깨를 흔들며 흥을 돋운다. 이제 심아일이 부르는 처음 몇 소절, “I can’t stop laughing/I can’t stop dancing”이 댄스 대통합을 이뤄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뮤직비디오에서 입으려고 주문했던 번쩍이는 우주복으로 또 하나의 파격을 가미한 인디스땅스 2024 무대는 한층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심아일랜드의 프런트맨이자 과감한 기획자인 심아일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우리를 모르는 분들 앞에서 펼치는 공연이니 눈에 확 띄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의상을 보고 처음엔 당황하던 멤버들도 무대를 마치고 나서는 ‘최고의 선택’이라고들 했죠.” 전략은 대성공. 심아일랜드는 인디 록 밴드의 등용문인 이 경연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 733팀 중에서 1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이름을 알렸다.
후회 없는 선택이 최고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심아일에겐 태권도를 그만두고 음악으로 전향한 사건이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에 매진해온 그는 한국체육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스물두 살, 부상으로 맞이한 갑작스러운 휴식기에 음악의 세계로 훌쩍 옮겨갔다. “운동을 그만둘 때쯤 태권도에 ‘자유품새’라는 종목이 생겼어요. 피겨스케이팅처럼 음악에 맞춰 기술과 안무를 선보이는 것이죠. 초창기에는 다들 유튜브에 있는 무료 음악을 사용했는데, 어느 날 한 선배가 전문 프로듀서에게 맞춤 의뢰한 곡으로 대회에 나온 거예요. 너무 멋있길래 저도 대회용 곡을 직접 만들었어요. 그 후 자연스럽게 나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요. 다행히 주변 반응이 괜찮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심아일랜드에서 건반과 숄더 키보드를 맡고 있는 라파(Laffa)와 맞닿았다. 둘 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리를 놓아준 것이었다. 심아일에게 선뜻 협연을 제안한 라파는 공연 직후 밴드로 판을 키워보자고 부추겼다. 우주의 기운이 이들의 만남을 축복한 듯 멤버는 금세 꾸려졌다. 라파와 같은 대학교 19학번 동기인 기타리스트 손세원, 베이시스트 장수원, 드러머 김경훈이 꼭 필요한 타이밍에 한꺼번에 등장했다. 그리고 2023년 11월, 심아일랜드는 언플러그드 홍대에서 탄생을 알렸다.
이후 첫 EP 앨범 <Cheol-Su>(2024)가 세상에 나왔다. 타이틀곡 ‘Hoo! ha..’를 만드는 데만 6개월이 걸렸을 정도로 깊이 고심한 작업이었다. 기타를 좋아하고, 강렬함을 갈망하며, 밝고 활기찬 ‘철수’를 형상화한 봉제 인형이 앨범 커버를 장식한 이 앨범을 통해 심아일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커버린 세상의 모든 어른을 응원하고자 했다. 의외의 기쁜 수확은 그 여정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동안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 느꼈던 순수한 즐거움을 다 함께 만끽했다는 것이었다. 선한 눈매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손세원이 입을 열었다. “합주가 너무 힘들 때도 있었는데, 막상 기타를 잡으면 재미있었어요. 혼자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각자의 연주가 하나로 합쳐질 때, 신나더라고요. 그런 재미를 앞으로도 계속 느끼면서 음악 하고 싶습니다.” 진중한 옷차림과 대비되는 발랄한 몸짓으로 유쾌하게 <보그> 촬영의 스타트를 끊은 라파가 덧붙였다. “기분이 다운된 날에도, 곁에 있는 애들이 행복해 보이면 덩달아 신이 나요. 끝까지 이렇게 교류하고 싶어요. 어렸을 때 친구가 울면 따라 우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에 계속 공감하면서요.” 원맨 밴드로 활동했던 2023년,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심아일의 ‘아이를 찾습니다’는 2년 뒤 심아일랜드의 싱글 앨범 <아이를 찾습니다>(2025)로 확장됐다. “몸이 다 자라버린 어린이들을 위해 음악을 하자”는 심아일의 다짐이 그렇게 무사히 지켜지고 있었다.
물론 아이도 슬픔을 겪는다. 김경훈이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신의 이야기를 건넸다. “어렸을 때부터 조금 우울하기도 했고, 주변 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자칫하면 탈선할 수도 있었는데 열네댓 살 때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바꿨죠. 세상에 그처럼 별나고 독특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어요. 소극적이던 제가 무대를 꿈꾸게 됐고요. 요즘은 그 시절의 저와 같은 누군가가 우리의 음악을 통해 탈선에서 돌이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멤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T’ 성향이 100%인 장수원도 의외의 대답으로 모든 멤버를 놀라게 했다. “심아일랜드의 음악이라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 기쁨이든, 감동이든, 무엇이든 일으키면서요.” 심아일랜드의 모든 곡을 거친 플레이리스트가 이번에는 심아일의 발라드곡을 재생했다. 상실의 슬픔을 위로하는 ‘애도반응’, 실제 부모님의 편지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고찰한 ‘별과 당신’에 귀 기울이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두 번째 EP는 그런 차분한 감정으로 가득한 앨범이 될 것이다. ‘영희’라고 소개한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밑 빠진 독’은 이미 공연에서 꾸준히 선보여왔지만, 수록곡 6곡을 아우르는 최종 앨범은 10월쯤 공개할 예정이다. 멤버들이 입을 모아 “유일하게 숲을 보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심아일이 청사진을 들려줬다. “사실 데뷔할 때부터 철수, 영희, 바둑이로 이어지는 3부작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어요. 철수가 신나는 음악이라면 영희는 다소 우울하고 몽환적인 음악, 마지막으로 바둑이는 따뜻하고 감성적인 음악을 상징합니다. 3개의 미니 앨범을 엮어 첫 정규 앨범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앞서 우울했던 청소년기에 대해 터놓던 김경훈은 ‘영희’에 담긴 진중한 이야기야말로 심아일랜드의 음악이 계속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노래가 마냥 신나지만은 않거든요. 그 멜랑콜리함을 지켜가고 싶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이유 모를 아련함을 느끼게 하는 그 뭔가를 잘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첫 단독 공연, 첫 페스티벌, 첫 해외 무대, 첫 대학 공연 등 기분 좋은 첫 경험이 순풍을 더해주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베트남 호찌민에서 열린 호조(Hozo) 뮤직 페스티벌 공연은 특히 좋았어요. 소통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제까지 선 무대 중 규모도 제일 크고, 무대연출과 호응 면에서 배움도 정말 많았죠.” 손세원이 미소를 지으며 회상했다. 심아일이 같은 무대를 또 다른 시선으로 해석했다. “경연만 나가면 1, 2등 하던 때였어요. 충분히 준비했으니 가면 당연히 잘할 거라고 여겼는데, 그 외에도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걸 느꼈죠. 좋은 약이 된 시간이었어요.” 가녀린 체구에 톰 브라운 셔츠와 치마처럼 보이는 통 넓은 팬츠를 입고 <보그> 카메라를 응시한 장수원은 거제도 라이브 하우스 언드(UND)에서의 공연을 언급하며 맑게 웃었다. “갈 때마다 행복한 곳이에요.” 김경훈은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한경록의 생일을 기념하며 시작된 후 어느덧 홍대를 대표하는 축제가 된 ‘경록절’ 공연을 의미 있는 순간으로 꼽았다. “경록절에서 공연을 했던 수많은 신인 밴드들이 정말 좋은 밴드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왔어요. 밴드 신을 동경하던 중학생 때부터 은연중에 그 무대에 설 날을 꿈꿔왔죠. 마침내 그 꿈이 현실이 된 날, 너무 벅차서 맥주를 마시고 무대에 올랐어요.” 듬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라파가 모든 순간을 감사하며 되뇌었다. “인디스땅스에서 1위를 해서 ‘딩고’에 출연할 수 있었고, 부산국제록페스티벌과 8월 3일에 서는 인천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도 루키 경연에서 수상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를 수 있었어요. 물론 우리에게도 참가하는 경연마다 떨어지는 시기가 있었죠. 하지만 계속 도전하니 되더라고요. 좋은 성과 덕분에 우리 음악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그다음은 뭘까? 장수원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다 같이 이야기했는데, 기념비적인 U2의 공연 이후 아마도 모든 밴드가 꿈꾸고 있을 스피어 돔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거기서 ‘Universe Party’를 연주하면 너무 행복하지 않을까요?” 심아일과 손세원이 목표를 재설정한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 목표가 딱 3개였어요. 라이브 클럽 데이, 펜타포트, 대학 축제, 최근 다 이뤘죠. 다음을 그려보자면, 밤 시간대에 펼쳐지는 펜타포트 메인 무대와 장충체육관 공연이 떠오르는군요. 올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혁오 밴드 무대를 인상 깊게 보면서 저도 거기서 우리 밴드만의 서사를 담은 공연을 기획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손세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인천 시민이라 인천에서 열리는 펜타포트에 서는 걸 고등학교 때부터 꿈꿨어요. 이제 꿈도, 몸집도 더 불려야죠.” 라파는 방송 출연을 겨냥한다. “어렸을 때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참 좋아했거든요.” 마지막으로 김경훈이 더 큰 미래를 그린다. “서울, 대구, 부산, 광주 같은 큰 도시에서 옛날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같은 자선 콘서트를 열고 싶어요.” 그릇된 시대에 대한 건강한 반항 정신과 음악의 힘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의기투합한 무대에서 헤드라이너로 선 심아일랜드는 어떤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보게 될까?
가슴 설레는 미래를 그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미래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불과 2년 전 심아일이 꾼 꿈은 더 이상 혼자만의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후, 심아일랜드의 다섯 멤버가 거칠 것 없는 허허벌판을 함께 내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곳에 실렸다. 그 장면에 한 번 더 눈길을 주며 10년, 20년 뒤에 다시 그들을 마주했을 때도 변함없는 모습이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