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너무 과하게 노력 중일지도 모릅니다
올해 초, 저는 앞으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본격적으로 지키기 위한 결심이었죠. 물론, 돈을 받고 하는 일은 빼고요(이 주제로 글도 썼어요!). 의무감 때문에 행사를 방문한다거나,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다거나 하는 일을 피하기로 한 겁니다. 즐기지 않는 액티비티 활동에도 끌려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를 들면 방탈출, 청중을 앞에 둔 진지한 발표, 여행이나 출장에서 낯선 사람과 방 같이 쓰기, 볼링, 추위에 떨면서 해야 하는 동계 스포츠, 무리해서 달려야 하는 고강도 운동, 길거리 팝업 행사, 단체 여행, 단체로 하는 모든 활동, 뭐 그런 것들요.
이후 생활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변화가 많았죠. 저와의 관계를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나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았거든요.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의 메시지는 ‘읽씹’했고요. 일종의 ‘관계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유한한 삶 속에서 어떻게 알찬 시간을 보낼지 고민하고, 저와 맞지 않는 관계를 대대적으로 걷어낸 거예요. 오로지 저 자신과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요.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SNS에 올라오는 유치한 감성 글귀에 심취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사람에게 감정 낭비하지 마, 아닌 것 같으면 진작에 끊어내자,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하니까’ 같은 글 말이에요!) 핑계를 대보자면, 저는 평생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인생 정화’가 이뤄진 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항상 불안해하던 지난날에 대한 반작용이었어요. 지금껏 해오던 것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방향으로 몸을 던져야 중간쯤 어딘가에 착지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죠.
8개월 정도 지난 지금, 저는 이전보다 행복해요. 달라진 삶에 만족하고요. 끝없이 이어지던 실속 없는 모임과 약속은 혼자만의 질 높은 시간으로 대체됐죠. 금요일 밤의 풍경도 바뀌었습니다. 와인 바에서 진탕 취해 2차로 간 클럽에서 60파운드(한화 약 12만원)씩 카드를 긁는 대신, 안락한 거실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는 식으로 말이죠.
좋은 일이지만, 제 삶은 문자 그대로 이전보다 훨씬 조용해졌습니다. 이건 긍정적인 의미만은 아니에요. 지난주 토요일에는 이를 닦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거든요. 이제 저는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묘한 기류가 흐르는 문자를 보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낯선 사람의 집에서 밤을 보내지도 않죠(물론, 결혼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요!). 스무 살 무렵에는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설렘을 느끼고 또 이런저런 대담한(?) 행동을 저지르곤 했는데 말이에요.
지금의 삶이 좋긴 하지만, 문득 얼마 전 <리덕트레스(Reductress)>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제목이 ‘마음의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심심해졌다’였거든요. 마치 제 얘기처럼 느껴졌어요. 혹시 저는 마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너무 철저하게 주변에 선을 그어버린 걸까요?
SNS에는 마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관계 정화’를 시도하다 어느새 고립돼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제는 그 어떤 관계도 필요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한 틱톡 유저가 한 말입니다. 이 유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킨 끝에 이제는 엄마하고만 시간을 보내요.” “마음은 평화로워졌지만, 마치 85세 노인 같은 삶을 살게 됐어요.” 제각기 다른 유저들의 말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피하고, 서로에 대한 선을 과하게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결국 ‘진짜 인생’을 사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것이죠. 고립은 공동체의 반대 개념이고, 마음이 편하다 한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건강한 상태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한 번뿐인 인생을 불편한 마음으로 살고 싶진 않잖아요. ‘아니오’라는 말을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그러면 그 중간은 어디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아주 젊은 나이에는 불편하더라도 다양한 관계를 경험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조용히 헬스장으로 향하는 20대 초반 청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거든요. 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 시간에 헬스장에 가는 건가요? 20대 초반이라면 그 시간에 번화가 한복판에서 부모가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이성과 키스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밤새워 퍼 마시고 술집 화장실에서 울다가 숙취에 찌든 채 아침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20대 초반은 실수도 해보고, 미쳐도 보고, 그러면서 배우는 시기니까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찾는 시기요. 모든 인간관계에 선을 긋는 게 정말 ‘마음의 평화’를 지킬 방법일지 아닐지, 알 수 없는 나이라는 거죠. “마음의 평화를 위한 철벽을 너무 쳤더니, 인생에 남는 경험도 없네요.” 한 틱톡 유저의 말입니다.
그렇다고 30대가 되자마자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 즐거웠던 경험을 회상해보면, 마냥 처음부터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어요. 이상한 예시긴 하지만, 처음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가 그랬죠. 정말 타기 싫었거든요. 하지만 막상 타고 나자 그해 가장 짜릿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저 역시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동안 다양한 종류의 롤러코스터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언젠가 중간 지대의 어딘가를 찾게 되기만을 바라야겠죠. 지루한 행사에 억지로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친구가 아닌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고립되지도 않는 곳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