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이다, 비나이다! 예술가 10인의 새해 첫 작품

진짜로 원한다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조각가, 판화가, 공예가, 전각가… 목표를 끝없이 상기하며 끊임없이 깎고, 갈고, 다듬고, 새기는 예술가 10인에게 <보그>를 위한 새해 첫 작품을 의뢰했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2024년을 위해 이들이 완성한 ‘해(Sun)’ 오브제와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치른 새해 의식.

공예가 윤여동의 금속 합

화장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주얼리를 모아 공예가 윤여동이 만든 금속 합에 넣는다. 뚜껑에 새겨진 해가 정리 정돈을 반기는 듯 웃고 있다. 금도금한 황동 얼굴에 루비와 가닛으로 만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인다. “잘 보이진 않지만 바닥에 ‘2024’를, 뚜껑 안쪽에는 ‘쨍’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그래픽적 요소를 넣은 건 처음이라 재미있었어요. 벌써 4년째 금속을 다루고 있는데 항상 ‘윤여동은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금속공예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늘 가장 현대적인 작업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연필 조각가 황수민의 연필 조각

오늘만큼은 스마트폰 메모장이 아니라 종이 위에 2024년 버킷 리스트를 적어본다. 연필 조각가 황수민이 작업한 연필도 꺼낸다. 깎아지른 산맥 사이로 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황수민은 손때 묻은 몽당연필에 글귀와 동물, 캐릭터 등을 새긴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SNS를 통해 작품이 알려지며 부산 벡스코에서 전시도 열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생애 첫 개인전. “연필로 더 다양한 조각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또 다른 재미있는 재료도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장신구 작가 송지원의 석영 반지

요즘도 새해 첫날엔 정동진에 인파가 몰릴까. 해돋이를 감상하듯 찬찬히 송지원의 돌 반지를 응시한다. 수많은 돌 중에서도 석영(수정)을 애정하는 그는 수정, 황수정, 연수정 등을 깎고 다듬어 2018년부터 30개의 반지 시리즈를 만들어왔다. “금속공예를 탐구하다 수정을 접하게 됐는데 강한 이끌림을 느꼈어요. 누군가에게 작은 행복과 편안함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세 번째 개인전과 일본 마루니 갤러리에서 열린 3인전 등으로 바쁜 한 해를 보낸 송지원은 2024년에는 더욱 단단한 내공을 발휘할 생각이다.

김가슬 작가의 동판화

처음엔 뭔지 싶었지만, 구릿빛 동판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원을 눈으로 좇으니 ‘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김가슬 작가는 “재미를 느끼는 일에 도전하자”는 다짐을 되뇌며 작업을 완성했다. 제작에 돌입하기에 앞서 무려 네 가지 버전의 스케치를 보내온 그에게서 꼼꼼한 성미가 느껴졌다.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요. 반복적인 도형 이미지를 사용하는 만큼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기 쉬우니까요. 표현한 것보다 항상 더 풍성하고 깊이 있게 제 작업물을 감상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힘을 냅니다.” 작고 섬세한 그의 판화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무용한 시간은 없다. 새해 첫날이 그렇게 흘러간다.

주얼리 디자이너 곽기연의 동전 뭉치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에 연말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초콜릿 포장지, 강렬한 레드 립스틱, 위스키 바에서 기분 좋게 결제한 영수증 등등. 그 사이 ‘日(해 일)’과 ‘해’를 새긴 곽기연의 동전 뭉치가 눈에 띈다. 박물관에서 전통 공예품을 볼 때마다 유리 속의 오브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던 곽기연은 아름다운 한국의 전통이 깃든 주얼리 브랜드 ‘기주얼리’를 론칭했다. 비대칭인 얼굴 표정과 무늬 등 공예품에서 느껴지는 ‘손맛’을 가미하기 위해 그는 정교한 3D 모델링보다 수작업에 몰두하는 편. 특히 외국인 구매자들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곽기연은 한국 전통을 더 다양한 오브제로 소개하는 2024년을 꿈꾼다.

공예가 김혜윤의 북엔드

새해를 맞아 책을 잔뜩 골랐다. 새 책을 사려다 말고, 묵혀둔 책 가운데 읽어야 할 것들을 추려서 가장 잘 보이는 책장에 꽂아둔다. 관상용에 그쳤던 아트 북과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영미 소설, 독파하지 못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 선택됐다.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북엔드는 우드카빙 작가 김혜윤의 작품. 결과 색에서 자연의 섭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무 오브제를 만드는 그는 <보그>를 위해 시크한 블랙으로 마감한 메이플 북엔드를 보내왔다. 표면에 새겨진 숫자 ‘2024’를 보며 이 책들만큼은 올해가 가기 전에 독파하기로 다짐한다.

세라믹 아티스트 연호경의 접시

무심코 지나치기 힘든 비주얼. 연호경 작가의 해 접시를 올리니 한층 유쾌한 식사 자리가 완성된다. ‘ㅋ’부터 스마일, ‘I Have No Idea(생각 없음)’ 등 오묘한 푸른빛이 도는 분청에 현재의 감정을 수놓아 유일무이한 도자기를 탄생시키는 연호경 작가는 이번에도 위트 있는 작품을 완성했다. “언제까지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사실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되물어요. 하지만 일 외에는 흥미가 없어서 결국 다시 작업대로 돌아가죠.” 그가 퇴근하고 한잔하는 상상을 하며 만들었다는 에그 스탠드도 옆에 둔다. “모질게 일한 스스로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세요. 내일도 달려야 하니까요.”

세라믹 아티스트 김지은의 머그잔

빼곡한 기록으로 꽉 찬 스마트폰 갤러리를 들여다본다. ‘지난해도 참 알차게 살았구나.’ 세라미스트 김지은에게도 잠들기 전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그중 잊고 싶지 않은 광경은 엽서나 포스터, 도자기로 만들어 곁에 둔다. ‘느리고 천천히’라는 뜻의 ‘Slow and Steady’라는 문장과 기대한 것보다 좋았던 여행지 플로렌스(Florence)를 결합해 만든 그의 브랜드 ‘슬로렌스(Slorence)’가 탄생한 경위다. <보그> 캐릭터를 상상하며 평소 잘 쓰지 않는 블랙 컬러의 컵을 디자인한 김지은은 자신의 도자기에 새겨진 그림이 누군가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길 바란다.

주얼리 디자이너 김윤애의 목걸이

새해 소망을 담은 자물쇠를 꼭꼭 걸어 잠근다. 올해가 끝나기 전 꼭 이루어지길. 자수 주얼리 브랜드 ‘애(ae)’의 대표 김윤애는 최근 선보인 자물쇠 모양의 네크리스에 특별히 <보그>를 위한 태양과 ‘2024’를 새겨 넣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희열이 컸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손 자수를 놓고, 금속과 패브릭을 다뤘죠.” ‘애’의 초기작을 구입한 발 빠른 소비자들이 여전히 주얼리를 잘 착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김윤애의 마음은 몽글몽글해진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초심을 떠올려요. 손으로 작업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올해도 열심히 달려야죠.”

서예 및 전각가 이한나의 도장

뭐든 마무리가 중요하다. 그래야 또 다른 시작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서예가 이한나가 나무, 돌, 금옥 등에 인장을 새기는 작업인 전각에 도전한 이유도 마지막 ‘한 끗’을 위해서다. “서예 작품을 완성하려면 낙관과 유인이라는 도장이 필요했어요. 훌륭한 전각 작가님들의 도장을 사용해도 좋지만 제 작품엔 저만의 손길이 깃들었으면 해서 전각을 시작하게 됐죠.” 그가 <보그>를 위해 만든 새 도장에 새겨진 글씨는 ‘화룡점정’. 청룡이 날아오르는 갑진년을 축하하며 올 한 해 모든 노력이 화려하게 보상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