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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прель
2023

‘라이스보이 슬립스’ 홀로 떠오른 삶, 함께 저무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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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삶을 마주하고 꿈으로 나아갔기에 가능한 가족 영화이자 성장 영화다.

“이 앨범 타이틀은 욘시가 나에게 지어준 웃긴 별명에서 빌려왔다. 내가 너무 밥만 먹고 잠만 잤거든.”

아이슬란드의 포스트록 밴드 시규어 로스의 프런트맨 욘시와 함께 ‘욘시 & 알렉스(Jónsi & Alex)’라는 프로젝트 듀오 밴드로 활동하는 알렉스 소머스는 그들의 데뷔 앨범 타이틀이 <Riceboy Sleeps>로 명명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사소한 제목이다. 대단한 의미가 없다. 그리고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제목은 그 장난스러운 별명에서 유래된 앨범 타이틀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안소니 심 감독이 각본을 쓸 당시 선곡해 들었던 앨범이 바로 <Riceboy Sleeps>였고, 이를 가제처럼 적었다가 뒤늦게 영화에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해 결정한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타이틀을 빌렸을 뿐, 해당 앨범의 음악에서 특별한 영향을 받은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부르던 별명을 인용한 앨범 타이틀처럼 <라이스보이 슬립스> 역시 영화상에서 한 소년에게 붙인 별명이 포함된 제목이라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전자가 친근한 사이를 증명하는 일화로서 웃음을 유발하는 언어라면 후자는 차별로 선을 긋고 상처를 입히는 언어라는 점에서 상이하다.

안소니 심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언급되는 ‘라이스보이(Riceboy)’는 영화상에서 한 소년을 놀리기 위해 동원되는 언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소년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백인 아이들이 발음하는 단어다. 일찍이 엄마를 따라 이역만리 캐나다로 건너온 소년은 생긴 것도, 먹는 것도 다른 아이들의 차별과 혐오를 감내하며 성장한다.

이 모든 건 1980년대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역만리로 건너갈 결심을 하게 된 소영(최승윤)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화다. 푸르스름한 먼바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과 함께 1960년, 한겨울 추위 속에서 계단에서 발견된 한 아이에 관한 사연이 들려온다. 바다와 산을 잇는 대자연의 풍광을 중계하는 스크린 밖에서는 오래된 구전설화를 읽어주듯 담담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소영의 삶을 구술하는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일찍이 길에 버려진 고아였지만 씩씩하게 자라나 자기 삶을 살아가던 소영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이로 인해 생명을 잉태하게 됐지만 야속하게 세상을 등진 남자로 인해 예상치 못한 삶에 봉착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 미혼모는 출생신고를 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소영은 고국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 그렇게 캐나다에 당도한다.

소영이 한국을 떠난 건 엄마로서 아이를 키울 자격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에 본 영화의 멋진 장면에 영향을 받은 덕분이기도 하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픈카를 탄 여자가 멋있어 보였던 소영은 자신이 본 외국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소영은 꼿꼿한 여자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국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의 삶이 녹록할 리 없지만 일찍이 만만치 않았던 삶에 굴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영은 캐나다에서도 삶을 꾸려나간다.

소영은 강인한 여자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도, 불합리한 차별에 맞서는 여성으로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다. 함부로 성희롱을 하는 공장의 남자 직원에게 ‘또 손을 대면 죽여버릴 것’이라 엄포를 놓고, 아이들의 차별적인 놀림에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른 어린 아들 동현(도현 노엘 황)에게만 정학을 통보하는 학교 선생에게 ‘이것이 인종차별’이라 일갈하며 어린 아들에게는 ‘고개 숙이지 마라’라고 주문한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공장에서 홀로 식사를 하며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처지라 해도 소영은 굴할 생각이 없다. 소영은 엄마이기 전에 강인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동현은 학교에 가기 싫었다. 자신의 이름이 ‘동훈’인지, ‘동현’인지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선생님도, 엄마가 싸준 김밥을 이상한 냄새가 나는 음식이라 놀리는 아이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출근한 뒤 아이를 홀로 집에 남겨둘 수 없는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를 꼭 학교에 보내야 했다. 그리고 동현은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차별을 감당하며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

그렇게 ‘라이스보이’의 시간이 지나가고,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파란 컬러 렌즈를 착용한 10대 소년으로 자란 동현(이든 황)은 더 이상 놀림거리가 아니다. 제법 친한 친구도 생겼다. 학교생활에도 원만하게 적응했다. 소영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공장에는 동양인 직원이 제법 늘어났고, 그들은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 동현도 소영도 더 이상 그 세계의 이방인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관계도 예전과는 달라 보인다. 여전히 서로를 아끼는 엄마와 아들이겠지만 예전만큼 서로에게 기대는 것 같진 않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마음 같지 않게 엇나가는 표현을 하고, 미묘하게 마음이 엇갈리는 것을 느낀다.

“1990년대에 이민자로 자란 경험을 언젠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안소니 심 감독이 살아온 삶이자 이뤄낸 꿈이다. 부모님과 함께 여덟 살 때 한국을 떠난 안소니 심 감독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 자리한 코퀴틀럼이라는 소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유년 시절에 다니던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엄마가 싸준 한국 음식을 먹다가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처음 구상한 영화도 지금과는 판이했던 듯하다. 처음에는 한국인 이민자 엄마와 아들이 캐나다에 적응하고자 고군분투하다 모종의 사건으로 한국에 되돌아가고 과거의 가족을 만나 정체성을 찾아가며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엄마보다는 아들을 중심에 둔 이야기이기도 했고, 장르적으로는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는 동현이 아버지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증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안소니 심 감독에게는 유년 시절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있다. 소영 역시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인물이 아니다. 지난 경험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밑그림 삼아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인 셈이다.

“어머니에 대한 전기 영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상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켜야 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내가 들은 이야기와 내 주변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이 조합된 이야기로 변모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계 이민자 여성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다.” 안소니 심 감독의 말처럼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온전히 사적 고백으로 점철된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라이스보이 슬립스>처럼 자기 고백이 반영된 영화란 필연적으로 어떤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창작자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알고 싶은 부분일 수밖에 없다. 실제 경험을 바탕에 둔 이야기라는 정보를 알게 된다면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그 영화에 공감하지 못했거나, 그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을 때 던져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어떻게 보편적인 공감으로 확장된 것일까?’라는 물음의 유의어나 다름없다. 그리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기이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입구로 관객을 이끌며 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내레이션으로 압축된 소영의 서사는 신화적인 성격을 띤다. 일찍이 버려진 아이였고, 온갖 궂은일을 해내며 성장했으며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아이를 잉태했지만, 아이 아빠가 죽는 바람에 먼 길을 떠나게 됐다는 이야기가 단 몇 분 사이에 담담한 음성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이 음성의 주체는 극 안에도, 이 세계에도 존재할 수 없는 이의 것이다.

안소니 심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의 내레이션을 하는 이가 일찍이 죽은 동현의 아빠 원식(강인성)이라 밝힌 바 있다. 이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는 영화 바깥의 정보다. 소영과 어린 동현의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는 좀처럼 가만히 머무르지 않는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고정된 픽스 숏이 나오는 장면은 드물다. 크고 작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뱃전에 떠 있는 것처럼 울렁거린다. 높이도 일정하지 않다. 대체로 인물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간혹 낮은 곳에서 올려다본다.

객관적 정보처럼 나열되는 컷 편집도 드물다. 특히 소영과 동현이 자리한 집 안에서의 촬영 분량은 인물의 움직임을 뒤쫓는 카메라 무빙으로 쭉 연결된 롱테이크 쇼트가 대부분이다. 소영과 동현을 비추는 대부분의 장면이 극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서가 반영된 시점을 체험하듯 중계된다. 적어도 이 시점이 그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이의 것일 리 없다는 사실 정도는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 시점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감독의 입을 빌려 듣기 전까지는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종 이는 성장한 동현이 뒤늦게 되돌아본 지난날의 플래시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소회가 개입한 시점의 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찰자 시점이 아닌 전지적 시점이 영화를 지배하는 듯한 인상이다. 그런데 이 시점의 주체가 이미 세상을 떠난 소영의 남편이자 동현의 아빠라는 사실은 결국 이 영화가 현실에서 부재한 존재를 복원하는 가족 영화라는 사실을 뒤늦게 환기시킨다. 실재하지 않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게 만드는 영화적 기법이 보이지 않는 가족의 역사를 인식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아주 개인적이지만 매우 보편적인, 영화라는 창작의 시작되고 다다르는 근원과 종착의 인과와 그 흐름의 유속을 살피게 만든다는 점에서 특별한 흥미를 제공한다.

1990년대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엄마와 어린 아들은 각기 다른 고독과 차별을 견디고 감당해야 한다. 말이 잘 통하지 않고, 피부색도 다른 백인으로 가득한 공장에서 밥벌이를 하는 소영은 혼자 밥을 먹는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고, 피부색도 다른 백인 아이로 가득한 교실에 앉아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던 동현은 이상한 걸 먹는다며 놀림받는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고, 혐오스러운 표현을 감당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어린 아들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존재가 된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존재인 두 사람은 그렇게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성장한다. 타인들의 세계를 견디고 돌아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으로서 함께 자리한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남들과 달리 자신에게만 부재한 존재를 인식하고 질문한다. 왜 아빠는 없고, 엄마만 있는지, 아들은 궁금하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설명할 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1999년, 10대 소년으로 자란 동현은 여전히 같은 것을 묻는다. 부재한 가족 구성원에 관한 소년의 물음은 사실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가진 소년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는 곧 안소니 심 감독이 지난날 품었던 물음의 반영일 것이다.

“1990년대에 이민자로 자란 경험을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예전에는 이민자들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기반이 완전히 사라진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트라우마를 느낄 수밖에 없다.” 안소니 심 감독의 말처럼 <라이스보이 슬립스>가 그의 과거를 온전히 재현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지만 지나온 삶에서 품은 물음만큼은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아빠의 시점 쇼트는 유년 시절에 사별한 아버지에 대한 향수가 반영된 제의적 표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영토에서 살아간다는 의문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따라갈 수 없는 운명의 복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년의 삶은 결국 부재한 아버지의 존재를 묻고 따라가는 여정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영의 전사를 신화적으로 압축된 내레이션 이후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끝내 부재한 가족 구성원, 즉 소영의 남편이자 동현의 아빠인 원식의 시점 숏으로 중계된다는 사실은 이러한 인과의 여정에 관객을 끌어들이고 함께 흘러가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중력이자 유속이나 다름없다. 결국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자아내는 필연적 질문을 신화적으로 미장하고 미스터리한 시점으로 강화한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영상은 1990년대라는 시대에 어울리는 감성적 필터로서 적절한 선택이자 이 영화가 누군가의 개인적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체험이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납득시키는 비범한 한 수이기도 하다. 동시에 캐나다를 배경에 둔 모든 장면이 좌우로 비좁은 1.33:1의 화면 비율로 제시되는 것과 달리 한국을 배경에 둔 모든 장면이 1.78:1의 화면 비율로 넓게 트이며 시야가 확대되는 인상을 주는 것 또한 인물의 심리 변화를 직관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통제력을 발휘한 연출이라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이러한 성취는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는 동양인 디아스포라 영화의 정체성 안에서 언급돼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게 만든다. 동시에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 <파친코>와 <애프터 양>의 코고나다 감독, <성난 사람들(Beef)>의 이성진 감독 등 북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이민자 출신 창작자들이 거둔 주목할 만한 성과에 한 뼘을 더하는 안소니 심이라는 이름의 등장과 발견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한 인장을 남긴 결과인 것이다.

“그녀를 급진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흥미롭다. 나는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로 이루고 싶었던 개인적 목표는 동양인 여성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었다. 동양인 여성은 항상 순종적이거나 정숙하기만 하고, 아니면 무술이나 비행을 하는 판타지 캐릭터로만 그려진다. 그 중간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동양인 여성, 특히 한국 여성이라면 그렇다고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다.”

안소니 심 감독의 말처럼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소영은 분명 이방인으로서 약자지만 약자로 대상화된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는 안소니 심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받은 인상과 자신이 경험한 동양인에 대한 주체적 관점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세계에서 감내해야 했던 정체성의 고민을 견뎌야 했던 동양인의 삶이 거듭 영화로 찾아오는 건 이 시대가 그만큼 더욱 너른 다양성을 요구하고 반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소영과 동현은 타인의 세계에서 반목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여정으로 나아간 뒤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가족이 되고, 내가 된다. 서로가 각자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마음을 품고, 그 마음에 머문다. 하나의 태양이 떠올라 두 개의 태양으로 저무는 이야기 끝에 비로소 밤이 찾아온다. 엄마도, 소년도,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어둠이 내린다. 삶이란 이렇듯 아름다운 꿈을 빚어내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매일같이 떠오르는 삶을 견디고 꿈으로 나아간 이가 만들어낸 진짜 영화다. 홀로 떠오르는 삶이었지만 끝내 함께 저무는 꿈, 실로 멋진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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