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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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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 베란다로 나가 선인장에 물을 흠뻑 주었다. 선인장에는 건조함보다 과습이 더 위험하다길래 한 달에 한 번꼴로 물을 주는데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더워 괜히 조바심이 난다.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기 시작하던 그해 여름, 내게 와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이다. 그때만 해도 나보다 작았는데, 이제는 나를 넘어서 천장을 향해 기세등등 자라나고 있다. 이러다 천장 끝까지 닿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어쩌지? 중간을 쳐서 다른 화분에 나눠 심기를 해야 하나? 가능하다면 자라는 그대로 두고 싶은데…. 생각을 해봐야겠다.

Pexels

정말 오랜만이었다. 살아 있는 뭔가를 곁에 두고 싶다고, 숨 쉬고, 자라고, 생기 있는 그것과 한 공간에서 살고 싶다고, 돌보고 돌봄받는 관계를 만들면 좋겠다고 느낀 것 말이다. 식물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기를 때마다 매번 죽이기 바빠 오랫동안 관심을 뚝 끊고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조차 버거울 때,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황무지 같을 때면 최소한의 돌봄조차 불가능하기도 한 법이니까. 상황이 극적으로 나아진 것도 아니었을 텐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그 여름, 꽤 크고 묵직한 선인장 두 덩이를 충동적으로 집 안에 들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선인장만 덩그러니 있는 게 괜히 안쓰러워서 두기만 해도 놀라운 성장세를 보인다는 몬스테라를, 봄바람 불어 마음이 스산하니까 올리브를, 여름 모기를 쫓기에 안성맞춤이라니 구문초를, 한없이 순해 보여도 꾸준함에 놀랄 거라는 말에 아스파라거스까지. 그렇게 반려 식물들과 몇 번의 여름을 보내고 여러 계절을 지나고 있다. 그 사이 처음으로 식물원에도 가보고, 식물도감이며 에세이도 찾아 읽었다. 여행이나 영화제 출장을 가기 전후로 식물부터 살피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꼼꼼하게 뭔가를 가꾸는 데 소질이 없다 보니, 볕 잘 드는 곳에 두고 물과 바람만이라도 잘 챙겨보자는 ‘기본기 충실’에 전념할 뿐이다. 다행히도 방목형 반려인을 갸륵히 여긴 반려 식물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주는 걸 보면 기특하고 감사하다.

김금희, ‘식물적 낙관'(문학동네, 2023)

김금희 작가도 식물 집사라고 하니 괜히 더 반갑다. 그녀의 산문집 <식물적 낙관>(문학동네, 2023)을 읽다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식물 집사 중에는 나처럼 뭔가를 인위적으로 가하는 행위가 영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양이 안 멋지더라도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만 하면 일단 나는 흐뭇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가드닝에 있어서는 꽤 낙관주의자인 셈이다.’(27~28쪽) ‘어머, 나도 그런데!’ 하며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도 식물에 관해서만큼은 꽤 낙관적인 셈이다.

작가가 말하듯, 이 책은 ‘가드닝에 관한 안내서’도, ‘일상의 다양한 주제를 담은 여느 형식의 산문집’(257쪽)도 아니다. 그저 ‘내 방 식물들에 관한 편파적인 다정의 기록, 내가 읽고 쓰는 문학에 대한 단상들, 식물 ‘하는’ 마음에 대한 하루하루의 일기’(259쪽)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어떤 산문 작업을 할 때보다 자유롭게 썼다고 한다. 그것은 짐작하건대 우리가 식물에 관해 말할 때 식물 덕분에 자연히 일어나는 일, 혹은 식물과 닮아가는 과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식물을 대할 때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어느 면에서는 무덤덤해진다. 정확히는 의심하지 않는 마음이 든다. 쓸 때나 읽을 때나 심지어 스스로 펼쳐나가고 있는 생각의 연쇄 속에서도 정말 그런가, 옳은가, 착시가 아닌가를 묻는데 식물들 앞에서는 그런 날카로운 반문을 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질서로 움직이는 완전한 세계가 있으니까. 나의 몫으로 남는 건 의혹이나 불신이 아니라 경탄과 그를 통한 일종의 발심(發心)이다.’(28쪽)

식물을 가까이 두고, 식물과 함께 산다는 건 경직된 마음의 빗장을 풀고 온유한 사랑으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식물 집사가 관상가(觀賞家)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식물들이 펼치는 드라마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는 것 아닐까. 우리는 결과의 확인자가 아니라 과정의 조력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매일같이 물시중을 들고 해충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며 잎이 지면 그 쇠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나름 사랑의 서사를 펼쳐 보이고 있는 셈이다.’(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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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식물 덕후나 전문적 식견이 있는 식물 집사까지는 못 되더라도, 식물과 함께 사는 지금과 같은 삶이 좋다. 식물을 키우기 전과 후의 나의 생활, 생각하는 법, 심지어 글감까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식물과 친화적인 방향으로, 식물의 생장과 식물이 알려준 지혜를 생각하는 쪽으로. 그것이 내 삶을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잘 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잠시 고개를 들어, 내 옆에서 창을 향해 맹렬히 줄기를 뻗는 몬스테라의 생장을 지켜본다. 이런 잠깐의 시간이 일상에 생겼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원고를 마감하고 나면 그동안 물에 담가 키워온 작은 몬스테라들을 데리고 동네 화원에 가야겠다. 적당한 크기의 화분에 잘 옮겨줄 생각이다. ‘식물을 기를수록 알게 되는 것은, 성장이란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 각자 떠나는 제멋대로의 (때론 달갑지 않은) 모험이라는 사실이다. 진딧물의 습격을 받고도, 가지의 어느 한편이 꺾인 채로도 동시에 새잎은 나고 나뭇가지는 길어진다. 성장이라는 무람한 에너지는 늘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발산된다.’(10쪽) 이 작은 몬스테라들이 신나게 떠날 모험이 다가올 가을을 채울 것이다.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256~257쪽)

다른 길이 없어서, 낙관을 몰라서, 그해 여름의 나는 식물과 만났나 보다. 식물은 언제나 내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내준다. 그 영향 아래서 ‘식물적 낙관’을 조금씩 더 받아 안고 싶다. 부디, 함께, 무탈하게 이 여름을 보내길 바라며.

*이 글의 첫 문장은 <식물적 낙관>의 ‘이 글을 쓰기 전 발코니에 가서 물을 주었다’(5쪽)에서 영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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