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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вгуст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펙터클은 재난이 아니라 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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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펙터클은 재난이 아니라 광기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재난은 익숙한 노래와 함께 찾아온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노래 ‘즐거운 나의 집’을 넣었던 또 한 편의 한국 영화가 떠올랐다. 임상수 감독의 2003년 작 <바람난 가족>이다. <바람난 가족>은 한국 사회의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날카롭게 조롱하던 영화다. 어어부 프로젝트가 원곡의 서정성을 무너뜨려 괴기하게 불렀던 ‘즐거운 나의 집’도 같은 의도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아파트 역사를 보여주는 영상과 함께 들리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즐거운 나의 집’ 또한 가사와 정반대의 현실을 드러낸다.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쉴 곳’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남들만큼 산다는 지표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남들보다 잘 산다는 자랑이다. 가장 믿음직한 재산이자, <기생충>의 대사처럼 같은 계급끼리 ‘믿음의 벨트’를 형성할 수 있는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처럼 아파트를 둘러싼 다층적인 욕망을 초유의 재난에 밀어 넣는다. 보고 있으면 이 영화의 ‘즐거운 나의 집’은 정말 애잔하게 들린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재난에는 전조 증상이 없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서울은 뒤집어지고, 아파트와 빌딩이 무너진다. 그런데 황궁아파트 103동만은 그대로 남는다. 신축 아파트 드림 팰리스의 생존자들이 추위를 피해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식량과 물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니 갈등은 필연적이다. 급기야 이들 중 일부가 원래 주민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주민들은 대책 회의를 연다. 공감 못할 사연은 하나도 없다. 평생을 작은 빌라에서 살다가 23년 만에 드디어 아파트를 갖게 된 중년 부부, 아마도 가진 재산을 자식에게 대부분 물려주고 낡은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을 노인들, 은행 대출로 대부분의 집값을 충당했지만 그래도 아파트를 가졌다는 자부심으로 사는 주민. 그리고 신축 아파트 주민들의 배척에 상할 대로 상했던 주민의 마음이 있고, 그래서 더더욱 이 아파트 주민들의 권익(사실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발로 뛰던 부녀회장도 있다. 이 모든 감정과 현실적인 디테일이 빛나는 황궁아파트 주민 대책 회의 장면은 이후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훌륭한 빌드 업이다. 이들에게 아파트는 그들이 살아온 역사이자 현재다. 그런 아파트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아파트 밖을 나가면 동사할 게 뻔한 한겨울이지만,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드림 팰리스 생존자를 ‘외부인’으로 명명하며 아파트 밖으로 내쫓는다. 여기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갖는 뚜렷한 개성이 부각된다. 기존 재난 영화의 문법에서 혼자 살겠다고 경거망동하는 인물들은 꼭 비극적으로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들을 관객의 맨 앞에 들이민다.

1년 중 가장 더운 기간에 개봉했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영화의 연대기에서 가장 차가운 쪽에 놓이게 될 것이다. 여름 텐트 폴 영화가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불편하다. 관객 입장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을 돕지 않는 황궁아파트 주민을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난 이전에는 자기네 놀이터에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외벽으로 길을 막았던 외부인들이 되레 뻔뻔해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내 집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뜻으로 뭉친다는 건 매우 큰 명분을 갖는다. 하지만 그런 명분마저도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날 때는 공포가 된다. 현실에서 포털 뉴스와 소셜 미디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들었던 여러 ‘아파트’ 괴담처럼 말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쾌적함 유지를 명분으로 쌓은 벽, 그 벽으로 가로막힌 기존 주민들의 생활 동선,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 사이의 철저한 갈라치기. 임대 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경비 노동자를 향한 갑질 사건 등등.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아파트 주민들 또한 처음에는 “이제는 위아래 없이 모두 평등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파트의 관성을 회복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대전제에 따라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벽을 쌓고, 내부에서는 엄격한 생활 규칙을 강조하며 이를 어긴 사람들을 멸시한다. 재난의 원인 규명과 해결, 극복, 희생의 서사 대신 냉소적인 풍자를 가득 넣은 재난 영화라니. 하지만 한국 사회의 ‘아파트’란 상징에 공감하는 관객이라면 황궁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풍경마저 기가 막힌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일 것이다.

무엇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 사회의 광기를 과감한 영화적 시도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자기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했다는 믿음에 도취되어간다. ‘외부인’들은 ‘바퀴벌레’로 불리고, 그래서 단지 내의 안락한 삶을 위해 박멸시켜야 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도취되다 못해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가장 놀라운 스펙터클이다. 특히 가수 윤수일이 1982년에 발표한 후 지금까지도 불리는 노래 ‘아파트’와 함께 묘사되는 황궁아파트의 파티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노래를 부르는 인물의 얼굴에 극단적으로 다가가는 클로즈업, 아파트 외벽에 어른거리는 주민들의 그림자와 함께 들리는 <아파트>의 가사는 공포감과 쓸쓸함을 동시에 전한다. 그들 모두 이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고, 동시에 한국인 또한 아파트에 대한 집착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은 서늘한 기운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재난이 극복된 후에도 영화 속의 한국인들은 다시 아파트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는 가장 늦게 재건축이 되어 이곳의 주민들은 또다시 산 아래 신축 아파트를 선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파트를 떠나는 건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려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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