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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юнь
2023

두고 온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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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어느 저녁, 잡지사 두 곳에서 함께 일한 적 있는 옛 직장 동료와 오랜만에 만났다. 그녀가 읽고 좋아서 내게도 권하고 싶다며 책 한 권을 선물로 건넸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마셔보니 향과 맛이 좋고 잠도 잘 온다며 차를 전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어떤 날 괜스레 작은 무엇이라도 나누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날은 둘 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Unsplash

성해나의 소설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그렇게 받아 안았다. ‘두고 왔다’는 저 말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마음이 머무는 건 어째서일까. 두고 온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든, 심지어 어디든, ‘두고 왔다’는 건 이미 그로부터 멀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임을 안다.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더는 내가 있는 이쪽에는 없는 무엇을 바라보는 일, 오직 저쪽에만 있을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두고 온 것을 생각한다는 건 필시 돌아보는 자만의 몸짓과 시선이며 태도일 것이다. 이제는 무던해질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무감해질 만도 한데, 누군가의 고개와 시선은 저쪽을 바라보길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과거에 사로잡히거나 얽매여서가 아니라, 지나온 그 길을 바라봐야만 다음 길이 보이는 이의 기질, 예민하고 섬세한 마음, 오래된 응시일 거라 짐작한다. 미련일까, 후회일까, 아쉬움일까, 자성일까. 그 모든 것이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할 어중간하고 어슴푸레한 기억과 상태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p.38)는 문장은 그런 사람을 이해하는 이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일 것이다.

성해나 ‘두고 온 여름'(창비, 2023)

<두고 온 여름>에는 4년 남짓의 시간 동안 잠시나마 ‘가족’이고자 했던 이들이 있다. 기하와 기하 아버지, 재하와 재하 어머니. 어른들의 결합으로 뜻하지 않게 형과 동생이 된 소년들. 소설은 기하와 재하의 시선을 오고 가며 느슨하게나마 그들이 가족으로 보낸 시절과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기하와 재하가 재회한 한때와 또 얼마간 시간이 흘러 현재가 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시선의 오고 감을 통해 소설은 우리에게 기하가 기억하고 겪은 것과 재하의 그것 사이에 서늘한 격차가 있음을 담담하게 전해온다.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점 사이로 엇갈리는 마음과 뒤늦은 깨달음이 지나가고 미처 몰랐던 지난 이야기가 고요히 흐른다.

시간이 지나 이들은 어느새 흩어지고 저마다 다른 길 위에 서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를 떠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 주변을 맴도는 그것, 어쩌면 두고 왔을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것, 바로 카메라와 사진이다. <두고 온 여름>은 사진사였던 기하의 아버지가 연례행사처럼 기하의 사진을 찍어 사진관에 걸어두곤 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류를 좇는 일에는 영 관심이 없던 아버지가 새로운 가족을 맞아 중고 DSLR 카메라를 구입하고 가족이 된 네 사람이 그 카메라 앞에 서본다. 기하 아버지에게도 재하 어머니에게도 가족사진이라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기하 아버지와 재하 어머니가 헤어지고 난 뒤 감쪽같이 사라졌던 카메라가 다시 등장하는 건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다. 성인이 돼 만난 기하와 재하가 가족이던 그 시절 함께 갔던 여름날의 인릉을 다시 찾을 때 카메라는 재하의 손에 들려 있다. 아버지가 재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다. 기하는 자신에게는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한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재하가 찍는 사진이 왠지 모르게 기하의 아버지가 찍은 사진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오랜만의 인릉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서서 어색하게나마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역광 속에서 누가 기하이고 누가 재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또 한참 뒤, 멀리 일본 고베에 자리 잡은 재하가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인 오오누키 씨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오오누키 씨는 재하가 찍은 인릉의 홍살문 사진을 가져도 되느냐 묻는다. 재하는 그 문이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함께 드나드는 문이라고 설명해준 사람이 아버지인지 기하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재하가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오오누키 씨는 사진의 뒷면에 편지를 쓴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대지진으로 아이를 잃은 센다이에 사는 동생. 이 구절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이 소설의 저력에 다시금 놀란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정갈한 문체로 야무지게 자신의 세계를 다지고 설득해오던 소설이 이번에는 더 너른 시선과 품으로 일순간 제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닌가.

Unsplash

우리가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저쪽에 뭔가를 두고 온 게 아닐까 느낀다면, 그것은 비단 소설 속 네 사람의 한 시절만이 아닐 것이다. <두고 온 여름>은 비극적 재난과 재앙으로 저 멀리 소중한 사람을 두고(잃고) 이쪽으로 와야만 했던 홍살문을 넘나든 사람들의 아픔의 시간까지도 너른 품으로 품고 있었다. 오오누키 씨는 이제 재하에게 형에게 보낼 편지를 써보라고까지 권한다. 망설임 끝에 재하가 고른 사진에는 다시 찾은 인릉의 역광 속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이 있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알 수 없던 두 사람. 아버지가 찍은 기하의 사진에서 시작한 소설은 아버지가 건넨 카메라로 찍은 기하와 재하의 사진으로 끝을 맺는다. 사진은 이제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실은 편지가 되어 어딘가로, 누군가에게도 흘러갈 것이다. 과연 이 편지가 된 사진이 잘 도착할 수 있을까. 누가 이 편지가 된 사진을 받게 될까. 기하일까. 아닐까.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다만 재하는 이렇게 속삭일 뿐이다. “누구든 그곳에서는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바라며…”(p.143) 당신이 두고 온 여름이, 그때의 당신이 부디 무사하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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