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 겐고가 남산을 찾은 이유

전 세계를 오가며 400여 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건축가 구마 겐고. 그가 또 하나의 작고 느리고 생태적인 건축을 위해 남산을 찾았다. 구마 겐고(Kengo Kuma)는 건축가이자 왕성한 저술가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을 살펴보면 <약한건축> <자연스러운 건축> <삼저주의> <연결하는 건축> <작은 건축> 등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심지어 그는 빙글빙글, 술술술술, 삐죽삐죽, 북슬북슬 같은 의태어와 의성어로 건축을 설명하기도 […]

전 세계를 오가며 400여 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건축가 구마 겐고. 그가 또 하나의 작고 느리고 생태적인 건축을 위해 남산을 찾았다.

구마 겐고(Kengo Kuma)는 건축가이자 왕성한 저술가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을 살펴보면 <약한건축> <자연스러운 건축> <삼저주의> <연결하는 건축> <작은 건축> 등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심지어 그는 빙글빙글, 술술술술, 삐죽삐죽, 북슬북슬 같은 의태어와 의성어로 건축을 설명하기도 한다. 명백하지 않고 모호한 의태어와 의성어로 풀어낸 건축 이야기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이고 리드미컬하다. 20세기는 콘크리트와 유리로 구축한 상자를 토대로 강한 건축을 추구했지만, 우리를 상자에서 상자로 이동하는 삶에 길들게 만들었다. 구마 겐고는 상자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삶이 서로 포개어질 수 있는 건축을 꿈꾼다. 그렇기에 작고 약하고 낮고 느린 건축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작은 건축’은 단순히 건축의 규모를 줄인 축소판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어렵지 않게 만질 수 있는 단위의 건축’에 가깝다. 코로나로 1년 연기된 도쿄 올림픽은 구마 겐고가 설계한 신국립경기장에서 열렸다. 지붕과 외장재 등에 목재를 활용한 새로운 경기장은 이전 올림픽에서 보여준 웅장하고 압도적인 규모와 형태는 아니었지만, 바람과 볕이 잘 통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아늑하게 감쌌다.

네즈 미술관,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에이스 호텔 교토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건축가 구마 겐고가 남산 자락에 새로 문을 연 화이트스톤 갤러리 인테리어 작업을 위해 지난여름에 이어 또다시 한국을 찾았다. 도쿄와 파리, 두 곳에 있는 구마 겐고 사무실을 오가며 400여 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에게 매일 비행기를 타는 일은 일상이다. 그는 지구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동하며 글을 쓰고 일을 한다. 건축을 향한 그의 사유는 이동 속에서 피어난다. 한국에 막 도착한 그를 인터뷰하며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부산으로 갑니다.” 다음 날 뉴스에서 부산롯데타워의 착공 기사를 보았다. 구마 겐고의 설계였다.

남산에 있는 화이트스톤 갤러리 한국 지점의 인테리어를 위해 방문했어요.

한국에는 여러 번 왔지만,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뷰를 처음 봤어요. 이곳은 정말 특별한 장소예요.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라는 특성상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공간 구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거의 매일 비행기를 타며 여행을 하고 있다고요. 세계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건축가에게 ‘격렬한 이동’은 일상이죠.

3년 가까이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적이었는데, 지난해부터 비행기를 편하게 탈 수 있게 됐어요. 가지 못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최근 여행 스케줄이 많이 타이트해졌죠. 코소보와 알바니아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겨 최근 다녀왔어요. 호기심도 많고 새로운 장소에 가는 걸 즐기기 때문에 항상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릅니다.

엄청난 스케줄과 이동을 소화하는데, 건강과 좋은 컨디션을 챙기는 비결이 있나요?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되도록 걸어요. 도쿄뿐 아니라 파리에도 설계 사무소가 있는데, 파리는 도시 전체가 산책하기 좋은 구조죠. 사무실과 집 모두 산책에 최적화된 지역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에도 자주 방문하는데요,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이 있나요?

한국 요리를 대단히 좋아해요. 단순히 불고기나 비빔밥뿐 아니라 홍어도 즐깁니다. 발효 생선 특유의 독특한 맛과 향이 강렬해요. 한국은 동해, 서해, 남해 등 바다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해산물 종류와 조리법이 다른 게 신기해요. 특히 서쪽을 따라 태안반도와 변산반도에서 즐긴 요리와 풍경이 기억에 남습니다.

서울에서 추천하고 싶은 장소가 있을까요?

지금 성수동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서울이란 대도시에 소규모 공장이 밀집된 지역이 남아 있어 신기했습니다. 파리 오피스도 공장이 모인 파리 11구에 위치하는데, 개인적으로 낡은 공장 지대에 끌리는 것 같아요.

건축가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은 1964년 어린 시절 단게 겐조가 설계한 국립요요기경기장에서 수영을 하면서 감명을 받아서라고 알려져 있어요. 그때 당신을 사로잡은 건축의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열 살 정도였어요. 수영을 하면서 국립요요기경기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직선과 곡선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져 아버지에게 물어봤죠. 그때 처음으로 ‘건축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어요. 원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사회와 공동체와 연결된 건축, 여러 사람과 협력해 주위의 환경을 변화시켜나가는 건축에 좀 더 매료되었죠.

미국 유학 이후 1986년 처음 도쿄에 사무실을 열었지만, 버블 경제로 10년 넘게 도쿄에서 일이 없었죠. 이 시기를 어떻게 견뎠나요? 그때의 경험으로 배운 점이 있다면요?

1980년대 후반 일본이 버블 경제 시기에 진입하면서 도쿄의 프로젝트가 모두 취소됐어요. 아픈 좌절의 시간이었지만 낙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도시 개발에 집중하던 건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죠. 도쿄에서 일이 없어진 덕에 지방 소도시의 작은 프로젝트를 맡아서 할 수 있었어요. 그곳에서 오랫동안 목수와 대장장이 등으로 활동하며 직접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장인들과 실제 현장에서 함께하면서 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배운 것만큼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2002년 ADK 쇼치쿠 스퀘어를 오픈하며 도쿄로 돌아왔죠. 제가 지금 같은 건축을 할 수 있는 것은 1990년대 불황 덕분입니다.

강한 일본을 보고 자랐지만, 약한 일본에서 건축을 시작했지요. 약한 일본 속에서 30년 넘게 건축을 하면서 당신은 어떻게 건축가로서 자부심을 지켜나갔나요?

어린 시절 요코하마의 오래된 목조 주택에서 살았어요. 주변은 개발되고 발전하고 있는 데 반해 낡은 우리 집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겼죠. 더구나 아버지는 경제성장 시기에 실직하셨어요. 성장과 발전, 거품경제까지 모두 겪은 다음의 일본이 오히려 더 성숙한 사회라고 봅니다. 단게 겐조 역시 고도 성장기의 건축가가 아닙니다. 사실 그는 부모님을 모두 히로시마 원폭으로 잃었죠. 전후 일본에서 살아온 건축가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되레 강한 건축을 추구했습니다. 일본은 지진도 많고, 그로 인한 대화재도 많은 나라죠. 건축가에게 이런 약점이 오히려 위기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건축이 세계적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러 건축가 중에 당신이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전후 위기의식이 오히려 일본 건축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해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이토 도요, 안도 다다오처럼 일본에는 훌륭한 건축가가 많아요. 이들은 콘크리트와 유리 같은 20세기의 재료를 사용했지만, 나는 전통 소재인 목재에 주목하고 있어요. 현재 목조건축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어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봤어요. 유사점도, 차이점도 분명합니다. 한국이나 중국은 굵은 나무를 박력 있게 사용하는데, 일본은 얇은 나무를 주로 사용해요. 자원의 한계죠. 이 한계를 활용해 건물을 짓다 보니 일본 건축은 선이 얇고 섬세한 스타일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팬데믹 이후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어떤 재료를 선택하느냐는 건축에서 중요한 화두입니다.

도쿄와 파리에 건축 사무실이 있죠. 진행되는 프로젝트도 400여 개라고 들었는데, 이를 어떻게 관리하나요?

일본 사회는 상하 관계와 효율적인 시스템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사실 나는 모든 직원과 친구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는 걸 선호해요. 이런 관계가 오히려 관리를 쉽게 한다고 봐요. 외국에서는 일본의 조직 관리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개인에게 자유를 주어야 교류할 수 있고, 그런 원활한 흐름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패드로 도면을 확인하지만 메모는 읽지 않고, 바로 직원에게 전화해 물어본다는 글을 봤어요. 당신은 어떤 리더인지 궁금해지더군요.

종종 일을 축구에 비유합니다. 축구에서 패스를 빠르게 하는 스타일의 선수가 있는데, 자신한테 공이 오면 갖고 있기보다 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서 일이 진행되도록 하는 걸 좋아해요.

패스를 하면서 감독 역할도 해야 하지 않나요?

나의 일은 감독이 아니라 정말 패스를 하는 일이에요.

여러 매체에 등장한 구마 겐고의 책상과 책장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놀라울 정도로 어지러워서 내 주변에서는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혼돈 속에서도 당신은 정확하게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찾을 수 있나요?

내 책상 주변에는 다른 직원의 책상도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두 알고 있어요. 정리가 안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름 정리를 해놓은 겁니다(진지한 표정).

대규모 건축, 작은 건축 그리고 글쓰기. 건축가 구마 겐고를 움직이는 세 가지 축입니다. 책도 많이 냈죠. 글쓰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비행기 안에서 주로 글을 써요. 글을 쓰다 잠깐 자고, 다시 일어나 또 쓰죠.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가 아니라 작은 수첩에 펜으로 적어요. 이렇게 적은 것을 직원에게 휴대폰으로 찍어 보내면 직원이 문서 파일로 정리해줍니다. 패스할 때는 사실 많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직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글을 쓰면서 내가 왜 그런 식으로 대답했고 일을 처리했는지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캐나다의 산림 생태학자 수잔 시마드(Suzanne Simard)의 회고록 <Finding the Mother Tree>라는 책이에요. 그녀는 건강한 숲에는 숲속의 모든 나무에 영양소를 공유하고 연결하고 치유하면서 강력한 네트워크를 조정하는 ‘마더 트리’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주 흥미롭습니다.

내일은 어디로 가는 비행기를 타나요?

오늘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묵고, 내일 부산에 갑니다. 제게는 이동이 특별함보다는 일상이죠.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