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건축

특정 도시가 시계 명가에 영원불멸의 뮤즈가 될 수 있을까?로마와 불가리의 관계라면 충분하다. “우리는 로마를 ‘영원의 도시(Eternal City)’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멈춰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얽매이지는 않아요. 미래에 투영하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멈춘 시간에 갇힌 겁니다. 그게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죠. 로마는 파리나 런던 같은 다른 도시처럼 역사적인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의 조화로 미래를 […]

특정 도시가 시계 명가에 영원불멸의 뮤즈가 될 수 있을까?
로마와 불가리의 관계라면 충분하다.

“우리는 로마를 ‘영원의 도시(Eternal City)’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멈춰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얽매이지는 않아요. 미래에 투영하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멈춘 시간에 갇힌 겁니다. 그게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죠. 로마는 파리나 런던 같은 다른 도시처럼 역사적인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의 조화로 미래를 나타내지 않으니까요. 그야말로 독특한 환경이고, 세계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죠. 훌륭한 야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로마는 땅을 파헤칠 때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에 현대적인 건축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불가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옥토 로마(Octo Roma)’와 ‘옥토 피니씨모(Octo Finissimo)’를 만든 남자 파브리치오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Fabrizio Buonamassa Stigliani)가 로마 건축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옥토 컬렉션의 ‘피니씨모’는 특히 불가리가 금세기에 선보인 남성 시계 올로제리 가운데 최고의 히트작이다. 나는 진심으로 옥토 컬렉션이 ‘불가리 불가리(Bulgari Bulgari)’ 이래 불가리의 남성 시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도 단종된 ‘스쿠버(Scuba)’ 모델에 특별히 애착이 가지만.

올해는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에게 디자인을 다시 검토하고 새로운 비전을 창조할 기회를 제공한 ‘옥토 로마’ 신제품이 출시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옥토’라고 하지 않아요. ‘옥토 로마’ 아니면 ‘옥토 피니씨모’죠. 재디자인을 통해 두 모델의 차이가 더 분명해졌어요. 새 ‘옥토 로마’는 첫 번째 ‘옥토 로마’보다 덜 과격하고 날카로워요. 전반적으로 심미성과 완성도가 더 높아졌죠.”

‘아씨오마(Assioma)’ 모델로 바닥을 친 후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의 지휘 아래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탈리아 수도 건축의 뼈대 속에서 ‘옥토’의 디자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겸손하게 설명한다. 가장 로마다운 시계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시계 디자이너는 물론 건축가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로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건축가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한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나 “건축은 시대와 장소를 표현하되,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길 갈망해야 한다”고 말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 같은 위대한 현대 건축가의 의견을 되풀이하는 점이 흥미롭다.

로마의 건축 문화가 거의 완성된 디자인을 제공해, 크기를 바꿔 손목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다음에 포로 로마노(Foro Romano)에 가게 되면, 고개를 들고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of Maxentius)의 반원통형 천장을 보라. 그러면 옥토 로마의 익숙한 팔각형 실루엣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거의 옥토 로마 케이스를 찍어낸 틀처럼 보일 수도 있다.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가 “팔각 형태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의 천장에서 나온 게 맞습니다”라며 확인해주었다. “잔니 불가리가 ‘바실리카 디 마센치오’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동일하게 원형이 결합된 팔각형을 1980년대 코인 컬렉션인 ‘젬메 눔마리에(Gemme Nummarie)’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남성 시계만이 아니다. ‘카라칼라 욕장(Baths of Caracalla)’의 바닥을 바라보면, ‘디바스 드림(Divas’ Dream)’에 영감을 준 밝고 다채로운 모자이크를 보게 될 것이다.

불가리에서는 로마를 피할 수 없다. ‘모네떼(Monete)’ 컬렉션은 몸에 걸침으로써 로마 공화국과 제국 시절을 떠올리고,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리차드 밀 때문에 2위로 밀려났다) 옥토 피니씨모 론칭 파티는 판테온 앞에서 라이트 쇼와 함께 호화롭게 치러지는 등 기업이 돌체 비타 시대의 ‘티베르강의 할리우드(Hollywood on the Tiber)’ 분위기를 신실하게 전달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판테온은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가 말하는 영원한 시간이 멈춘 도시 이론의 대표적인 예다. 그는 종이 위에 빠르게 스케치 작업을 시작한다. 빠르고 능숙한 그의 펜 놀림에 선, 사각형, 원, 기둥, 삼각형의 장식 팀파눔(Tympanum)과 원형 돔은 그가 일할 수 있는 도형과 형태의 집합이 될 때까지 모두 해체된다. “판테온은 여러 순수한 기하학적인 도형의 조합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 미학의 근원이죠. 우리는 거대하고 대담한 고대 로마 건축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비율과 디테일 측면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스타일이에요. 솔직하게 말하면, 불가리가 로마 건축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분명 일부 디테일에 영감을 받은 것은 맞지만, 우리는 건물이 아니라 시계를 만들잖아요. 대신 우리가 그 건물, 고대 로마 건축물에 깃든 영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게 맞지요. 단순히 디테일이 아니라 비율과 미학적 모티브, 형태의 조합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흡수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설명했다.

로마에서 자란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는 로마의 건축 문화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는 로마 건축 문화가 디자인뿐 아니라 예술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여긴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같은 형이상학파 예술가의 작품을 보면, 그림에 많은 건축학적 요소가 보여요. 하지만 그게 현대 건축물인지 고대 건축물인지 구별하긴 어렵죠.” 하지만 로마에는 공항 가는 길목에 건축학적으로 조성된 에우르(EUR)에 데 키리코의 초현실적 풍경이 실제로 존재한다. 1942년 로마 세계박람회 개최를 위해 1930년대 말 설계된 이곳은 과할 정도로 대담한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로마 제국의 영광스러운 거리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미래를 향한 비전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전후 재건 과정에서 에우르는 ‘비즈니스 허브’라는 대안적 미래를 발견했다. 수석 건축가 마르첼로 피아첸티니(Marcello Piacentini)의 비전은 단순히 목적만 바뀐 채 그대로 유지되었다.

“피아첸티니는 아무 장식 요소도 없는 신고전주의로 가자고 말했어요. 의회 궁전의 기둥이 바로 그런 것이었죠.” 부오나마사 스틸리아니가 두 개의 평행선을 그리며 설명했다. “이런 유형의 건축은 모든 장식을 없애는 게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해요. 그리고 로마 사람들이 ‘사각의 콜로세움’이라 부르는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를 보면, 그냥 트래버틴(Travertine) 석재로 만든 파사드뿐이죠. 잔니 불가리가 거기서 영감을 얻은 것 같아요. 이런 기념비적 건축물의 요소가 오래된 몇몇 광고에 나타나거든요.”

25피트 높이의 아치가 7층에 이르는 거대한 대리석 정육면체 건물인 ‘사각의 콜로세움’은 거인족을 위해 데 키리코의 그림을 3차원으로 실현해놓은 듯 냉엄한 직각 형태로 로마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10년 전쯤 펜디가 인수했을 때, 나는 당시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라거펠트를 인터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션과 건축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기가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완벽한 예죠.” 시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K)